티스토리 뷰
목차
이창동 감독이 연출하고, 전도연과 송강호가 주연한 영화로, 한 여성이 겪는 참혹한 상실과 그 이후의 종교적 구원, 그리고 인간적 고통의 복합적인 감정을 심도 있게 다룬 작품입니다. 2007년 칸 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전도연 수상)을 포함해 국내외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그 감정의 깊이를 더해주는 중요한 장치로 **슈베르트의 아베 마리아**가 사용되었습니다. 이 곡은 단순한 종교적 배경음이 아닌, 영화의 전체 주제인 ‘용서와 신의 부재’라는 메시지를 강력하게 시청자에게 전달하는 클래식 음악의 대표 사례로 손꼽힙니다.
줄거리 요약: 상실, 신앙, 그리고 용서의 역설
이혼 후 남편을 잃고 아들 준과 함께 서울을 떠나 밀양으로 이사 온 신애(전도연). 남편의 고향인 밀양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자 하지만, 낯선 도시에서의 적응은 쉽지 않습니다. 그녀는 자동차 수리공 종찬(송강호)의 도움을 받으며 새로운 일상을 시작하지만, 예기치 못한 비극이 닥칩니다. 어린 아들 준이가 유괴당한 후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되고, 신애는 세상이 무너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극단적인 고통과 절망 속에서 신애는 우연히 교회를 접하게 되고, 그곳에서 평온과 위안을 얻으며 신앙에 귀의합니다. 그녀는 아들을 죽인 범인을 용서하려는 마음까지 품게 되고, 결국 교도소를 찾아가 범인에게 진심으로 “용서한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범인은 이미 회개하여 신의 용서를 받았다고 고백하며 오히려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이 순간, 신애는 신에게 배신당했다고 느끼며 다시 신앙을 거부하고, 더욱 깊은 절망에 빠집니다. 영화는 끝까지 인간의 고통, 신의 의미, 용서의 본질에 대해 단정 짓지 않고 질문을 남기며 마무리됩니다. 이 모든 감정의 흐름과 신앙의 진폭을 감싸는 것이 바로 슈베르트의 '아베 마리아'입니다.
클래식 음악 해설: 슈베르트 ‘아베 마리아’의 상징과 구조
영화에 삽입된 곡은 **프란츠 슈베르트(Franz Schubert)**의 대표작 **‘Ellens Gesang III, D.839’**, 일반적으로 ‘아베 마리아(Ave Maria)’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곡입니다. 원래는 라틴어 가톨릭 기도문이 아니라 독일어 가사로 된 곡이지만, 이후 다양한 편곡과 가사로 재탄생하며 종교적 상징성을 갖게 되었습니다.
1. 음악적 구조 – 반복과 상승의 형식
아베 마리아는 단순한 멜로디가 반복되며 점차 음역과 감정을 끌어올리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이 반복은 기도의 반복을 상징하며, 신애가 구원의 손길을 계속해서 찾는 내면을 음악적으로 표현합니다. 중간 부분에서 음역이 상승하며 격정적으로 변하는 부분은 신애의 신앙 고조 구간과 정확히 맞물립니다.
2. 종교적 상징 – 성모와 신애
'아베 마리아'는 본래 성모 마리아를 향한 기도이지만, 영화에서는 신애라는 한 인간이 신을 향해 자신을 내맡기고, 이해받고자 하는 절박한 외침으로 사용됩니다. 즉, 성모 마리아를 향한 기도문이 ‘신애의 통곡’으로 전환되는 장면입니다.
3. 편곡의 특징 – 느린 템포와 억눌린 감정
영화 속 삽입된 아베 마리아는 원곡보다 느린 템포와 약한 다이내믹으로 편곡되어 있습니다. 이는 감정을 폭발시키는 것이 아니라 절제된 상태에서 최대의 고통을 표현하며, 신애의 억눌린 감정과 잘 어우러집니다.
장면 분석: 음악이 신과 인간의 경계를 묘사하는 순간들
1. 교회 장면 – 신앙의 상승
신애가 처음 교회 예배에 참석해 눈물을 흘리는 장면에서 아베 마리아가 잔잔히 흐릅니다. 음악은 기도문처럼 반복되며, 신애의 감정 곡선과 함께 고조됩니다. 화면은 클로즈업 없이 조용히 그녀를 따라가고, 음악은 신앙의 상승 곡선을 그립니다.
2. 교도소 면회 장면 – 배신의 폭로
범인이 “신의 용서를 이미 받았다”라고 말할 때 배경음은 단절되고, 직후 흐르는 아베 마리아는 더욱 냉정하게 들립니다. 이 장면은 음악이 주는 평온함과 대조적으로, 신애의 내면은 무너지고 있으며, 클래식 음악의 아이러니가 그 정서를 극대화합니다.
3. 엔딩 장면 – 정적 위에 남는 잔향
마지막 장면, 신애는 마당에서 머리를 밀고 텅 빈 눈으로 앉아 있습니다. 배경에 삽입된 아베 마리아는 더 이상 희망이 아닌 절망의 여운처럼 들립니다. 음악이 클로징 크레디트와 함께 사라지며, 신의 부재와 인간의 무력함을 고요하게 각인시킵니다.
결론: 아베 마리아, 용서와 절망 사이의 선율
『밀양』은 신앙을 단순히 구원의 수단으로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신을 찾는 인간의 고통, 용서하려는 의지, 그러나 되레 더 깊은 상처를 남기는 과정을 통해, 신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묵직한 질문을 던집니다. 그리고 슈베르트의 '아베 마리아'는 그 질문에 대한 음악적 언어입니다.
이 영화를 다시 본다면, 아베 마리아가 흐르는 순간들의 감정 구조에 주목해 보시길 바랍니다. 그것은 단순한 종교음악이 아니라, 인간이 신에게 기대고 싶어 하면서도, 끝내 신의 침묵에 절망하게 되는 아이러니한 경험의 반영입니다. 『밀양』은 아베 마리아를 통해, 구원보다는 '구원을 찾는 고통'을 말하는 영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