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목차
이창동 감독이 연출하고 윤정희가 주연한 작품으로, 언어와 삶, 죄와 용서, 아름다움과 추함 사이를 오가는 인간 존재의 복합성을 그린 영화입니다. 특히 시라는 예술 장르를 내러티브 중심에 둔 이 영화는, 감정을 직접적으로 드러내기보다는 시처럼 여백과 비유, 그리고 정적인 흐름 속에서 이야기를 펼쳐 나갑니다. 영화 전반에 흐르는 피아노 기반의 클래식 테마는
모차르트풍의 단정하고도 절제된 선율을 중심으로, 주인공 양미자의 내면과 감정의 결을 조용히 비춰주는 거울 역할을 합니다.
줄거리 요약: 죄의 침묵 속에서 시를 쓰다.
양미자(윤정희)는 60대 중반의 여성으로, 초등학생 손자 종욱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생활은 단조롭고 팍팍하지만, 그녀는 우연히 시 창작 교실에 등록하며 오랜만에 삶의 설렘을 느낍니다. 그러나 그녀의 일상은 곧 충격적인 진실과 마주하게 됩니다. 종욱이 또래 여학생을 집단 성폭행했고, 그 피해 학생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입니다.
학교 측과 가해 학생 부모들은 돈으로 사건을 무마하려 하며, 미자에게도 입단속과 함께 합의금을 마련하라는 압박이 가해집니다. 미자는 혼란과 죄책감 속에서도 시를 계속 쓰려 하지만, 삶의 진실은 그녀의 언어를 점점 마르게 만듭니다. 시를 통해 아름다움을 찾고 싶지만, 현실은 너무나 추악하고 침묵을 강요합니다.
결국 미자는 손자에 대한 책임, 사회적 강요, 그리고 시를 쓰기 위한 고통을 스스로 감당하며, 영화는 그녀가 남긴 시 한 편으로 마무리됩니다. 그것은 단순한 문장이 아니라, 삶 그 자체였으며, 죄의식과 아름다움, 말하지 못한 감정들이 응축된 하나의 고백이 됩니다.
클래식 음악 해설: 모차르트 풍 구조와 감정의 여백
영화 시에서 사용된 음악은 전체적으로 절제되고 단조로운 클래식 형식을 따릅니다. 피아노와 현악기의 조용한 조합은 모차르트의 후기 작품에서 느껴지는 정서적 균형과 단순함 속의 감정을 닮았습니다. 화려한 구성보다는, 반복과 여백을 통한 내면 묘사가 핵심입니다.
1. 모차르트풍 피아노 테마 – 감정의 골조
영화의 메인 테마는 단순한 피아노 선율로 시작됩니다. 몇 개의 음만 반복되며 주제를 형성하고, 이는 미자의 정적인 일상과 맞물려 반복됩니다. 모차르트의 피아노 소나타처럼, 복잡하지 않은 구성이 오히려 감정의 뼈대를 드러냅니다. 화성이 크게 이동하지 않는 대신, 감정의 결을 시간에 맡기듯 서서히 쌓아 나갑니다.
2. 첼로와 비올라의 저음 스트링 – 삶의 무게
미자가 죄책감에 짓눌릴 때 삽입되는 음악은 현악기의 저음부에서 반복적으로 연주되는 패턴입니다. 이 구조는 클래식 소나타 형식의 발전부와 유사하며, 감정이 선율로 확장되는 대신 낮게 가라앉습니다. 음악은 미자의 감정을 증폭시키기보다는, 그녀의 침묵을 감싸는 역할을 합니다.
3. 시 낭독 장면 – 미니멀 피아노와 페르마타
영화 마지막, 미자가 쓴 시를 낭독할 때 흐르는 피아노 음악은 단순한 음형에 페르마타(길게 늘이는 기호)를 활용한 연주입니다.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느낌을 주며, 시의 구조와 완벽히 맞아떨어지는 감정적 장치가 됩니다.
영화장면 분석: 클래식 음악이 감정을 대신하는 순간들
1. 시 창작 수업 첫 수업 – 피아노 모티프의 시작
미자가 처음 시 창작 교실에 입장할 때, 조용한 피아노가 몇 음만으로 모티프를 제시합니다. 이 짧은 선율은 그녀가 새로운 감정을 느끼는 ‘시작의 테마’로 이후 변주되며 사용됩니다. 음악은 마치 새 문장을 쓰는 첫 단어처럼, 감정의 흐름을 부드럽게 열어줍니다.
2. 피해자 어머니의 눈물 장면 – 현악기의 단조 전환
가해자 부모들과 피해자 어머니가 만나 협상을 시도하는 장면. 이때 배경에 흐르는 첼로의 낮은 단조 선율은, 도덕적 불편함과 인간적 죄책감을 동시에 강조합니다. 음악은 감정을 외면하지 않되, 감상적으로 소비하지도 않습니다.
3. 마지막 시 낭독 – 침묵 위의 피아노
미자가 마지막으로 쓴 시가 낭독될 때, 피아노는 한 음 한 음 조심스럽게 울립니다. 시와 함께 음악도 멈추듯 진행되며, 청각적으로도 ‘고백의 리듬’을 만들어냅니다. 클래식 음악이 감정의 동반자가 아닌, 감정 자체로 변모하는 순간입니다.
결론: 시처럼 말하는 클래식 음악, 침묵보다 깊은 울림
영화 시는 말로 정의할 수 없는 감정을 ‘시’라는 형태로 풀어내며, 영화 자체가 한 편의 시와 같은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음악은 그 시의 리듬과 감정, 여백을 채우는 언어 없는 시어처럼 존재합니다. 모차르트풍의 단정한 선율, 저음 스트링의 절제, 미니멀 피아노의 반복은 미자의 내면을 대사보다 더 깊이 있게 묘사합니다.
이 영화를 다시 본다면, 등장인물의 표정보다 배경에 흐르는 음악의 리듬을 느껴보세요. 그 리듬은 감정의 파형이며, 용서와 책임, 슬픔과 아름다움 사이를 오가는 미자의 발걸음을 따라가는 또 하나의 ‘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