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드 헤인즈 감독의 <캐롤(Carol)>은 1950년대 뉴욕을 배경으로, 두 여성 사이의 섬세하고 절제된 로맨스를 그린 영화다. 파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소설 『소금의 값(The Price of Salt)』을 원작으로 하며, 케이트 블란쳇과 루니 마라가 각각 캐롤과 테레즈 역할을 맡아 아카데미 6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되었다. 영화는 시대적 억압 속에서 피어나는 진정한 사랑을 고전적인 미장센과 우아한 음악으로 풀어낸다. 특히 드뷔시와 림스키-코르사코프 등 인상주의와 낭만주의 음악이 감정을 조용히 고조시키며, 클래식 음악은 영화의 정서를 절묘하게 이끈다.
1. 줄거리 – 억눌린 시대 속, 진심을 향한 여정
1950년대 초 뉴욕. 백화점에서 일하는 젊은 사진가 지망생 테레즈(루니 마라)는 크리스마스를 앞둔 어느 날, 딸의 선물을 사러 온 우아한 여성 캐롤 에어드(케이트 블란쳇)를 만난다. 캐롤은 고급스러운 분위기와 섬세한 언행으로 테레즈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기고, 이후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다시 만나게 된다.
캐롤은 부유한 가정의 전업주부지만 남편 하지를 떠나 이혼을 준비 중이며, 이전에 여성과의 관계가 있었다는 이유로 딸에 대한 양육권도 위협받고 있다. 테레즈는 남자친구와의 관계에 확신을 갖지 못한 채, 자신의 정체성과 감정에 대해 혼란을 느끼고 있던 중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점차 끌리고, 결국 함께 도로 여행을 떠난다.
여행은 둘 사이의 감정을 깊게 만들지만, 캐롤의 남편 측이 사설 탐정을 고용해 이들의 관계를 촬영하고, 이를 양육권 소송의 증거로 삼는다. 이에 충격을 받은 캐롤은 테레즈와의 관계를 끊고, 딸을 지키기 위해 법정 투쟁을 벌인다. 한편 테레즈는 사진가로서 자신의 길을 걷기 시작하고, 독립적인 삶을 꾸려간다.
영화의 마지막, 캐롤은 테레즈에게 다시 만날 수 있겠냐고 조용히 제안하고 떠난다. 마지막 장면에서 테레즈는 캐롤이 앉아 있는 식당으로 들어가 눈을 마주친다. 그 순간, 과거의 상처를 지나 이제 막 시작될 수도 있는 관계의 새로운 가능성이 열리며 영화는 끝난다.
2. 클래식 음악 해설 및 장면 분석
1. 드뷔시 – “달빛 (Clair de Lune)”
드뷔시의 인상주의 대표곡 ‘달빛’은 영화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테레즈가 혼자 사진을 정리하거나 캐롤을 떠올리는 장면에서 이 곡은 배경에 흐르며, 그녀의 내면 감정을 은은하게 비춘다. 이 음악은 말로 표현되지 않는 감정의 결을 따라가며, 불확실하지만 아름다운 감정을 담는다.
특히 ‘Clair de Lune’은 고백과 침묵 사이를 떠도는 감정, 여성들 사이의 관계가 품은 사회적 위태로움과 개인적인 아름다움을 동시에 암시한다. 이 곡은 극적인 반전이나 감정의 폭발이 없는 대신, 감정의 밀도를 높이고 있다.
2. 림스키-코르사코프 – 셰헤라자데
림스키-코르사코프의 교향조곡 <셰헤라자데>의 일부는 영화 중반부, 두 여인이 함께 여행을 떠나는 시퀀스에서 연주된다. 이 장면은 마치 현실에서 벗어난 ‘은신처’ 같은 느낌을 자아내며, 음악은 마법처럼 시간과 공간을 비틀어 놓는다.
<셰헤라자데>는 원래 아라비안 나이트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만들어진 곡이며, 이 음악을 통해 영화는 이 여행이 단순한 도피가 아니라 서로의 삶을 이야기하고 이해하게 되는 진정한 ‘서사’임을 암시한다.
3. 클래식의 역할 – 감정의 결을 따라 흐르는 미묘한 선율
<캐롤>은 대사보다 표정과 시선, 그리고 정적에서 감정을 읽어야 하는 영화다. 클래식 음악은 이 정적을 메우지 않고, 오히려 감정의 여백을 더욱 풍부하게 만든다. 음악은 인물들이 끝내 말하지 못한 감정을 대신하며, 테레즈의 시선 너머에 있는 캐롤의 고통과 바람까지도 담아낸다.
감정의 선율이 흐르는 장면들—백화점의 첫 만남, 호텔 방에서의 대화, 여행 중 마주한 창밖 풍경—이 모두가 음악과 어우러지며, 사랑의 본질에 대해 말하고 있다. 클래식은 이 영화에서 사랑의 언어이자, 시대의 억압을 견디는 조용한 저항이기도 하다.
결론 – 클래식과 함께하는 감정의 파편들
<캐롤>은 시대와 규범이라는 벽 앞에서, 사랑이라는 감정이 어떻게 조용히 피어나고, 또 어떻게 지켜지는지를 그린 아름다운 영화다. 클래식 음악은 그 감정의 파편들을 모아 하나의 선율로 엮고, 인물들의 침묵 속에 숨어 있는 말들을 대신 전달한다.
드뷔시의 ‘달빛’처럼, <캐롤>의 사랑은 조용히 빛나지만 쉽게 닿을 수 없는 거리에서 흐른다. 그리고 그 거리의 긴장을 음악이 견디고, 관객이 함께 느끼게 된다. 이 영화는 클래식이 어떻게 사랑의 메타포가 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감성적 걸작이다.